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다 시게루 (문단 편집) == 기타 == * 역대 일본 총리들 중 재임 횟수가 5회로 가장 많다. 45대 총리로 1차 집권했고, 이후 48대부터 51대까지 4대수를 연임하여 연임 횟수도 역대 총리들 중 가장 많다. 아니, 애초에 요시다 총리를 제외하면 3회 초과[* 3연속 집권도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가 전부다.] 연임 총리는 1명도 없다. 최장 집권 총리인 [[아베 신조]]도 총 재임 횟수는 90, 96-98대로 4회, 연임도 3회라 요시다 총리에 못 미친다. * 노회한 정치가답게 유머 감각도 뛰어났는데, 한 번은 선거 유세 중에 외투를 입고 유세에 나섰다. 한 시민이 요시다에게 "그 [[외투]](外套, がいとう 가이토-)를 당장 벗으시오!"라고 외치자 요시다는 '''"여러분! 이게 바로 가두(街頭, がいとう 가이토-)연설입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다의어|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본식 [[말장난]]([[다자레]])이었다. * [[파일:external/pds.exblog.jp/b0083835_19123882.jpg|width=100%]] 딸인 가즈코(和子)[* [[2.26 사건]] 때 20대였던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마키노 노부아키]]를 황도파 장교들로부터 지키고 언덕으로 피신시켰다. 후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아소 다로]]다.]와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외손자 [[아소 다로]]에게도 좋은 외할아버지였다나... 그리고 외증손녀 2명이 '''여왕'''[*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 남자는 친왕/왕.]이다.(...) 외손녀 [[아소 노부코]]가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했기 때문. 토모히토 친왕과 [[노부코 비]]는 두 딸 [[아키코 공주|아키코 여왕]](1981)과 [[요코 공주|요코 여왕]](1983)을 낳았다. 참고로 아키코 여왕은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미술사]])이기도 하다. * [[파일:090522-01.jpg|width=300]] 잘 웃는 것으로 유명했다. * 일본 총리가 되기 전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I'm sorry'를 심할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한 외국 외교관이 요시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Sorry([[쏘리]])'를 연발하고 다니냐"고 묻자 요시다는 "나는 장래에 총리대신(総理大臣, '''そうり'''だいじん '''소-리'''다이진)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고(…). 이 드립은 [[곤베에의 아임 쏘리]]라는 게임 제목으로 패러디된다. * [[영국]] 대사로 있을 때의 이야기 또 하나. 어느 일본 장관이 영국을 방문해서 요시다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시다가 그를 만나기 싫어해서 장관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 때마다 "대사는 외출했다고 말하라"고 직원들에게 명했다. 보다못한 장관이 주영일본대사관을 직접 찾아갔고 거기서 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그 사람도 "대사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요시다였다.''' 결국 장관에게 들켰다. 이 일화는 2017학년도 [[수능완성]]([[2017 수능]] 준비용이므로 2016년에 발매.) [[영어 영역]]에 나왔다. * 패전 후 일본에 주둔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식량 지원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식량 지원량을 더 늘려서 더 많은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맥아더가 통계를 보니 일본의 식량 사정은 지원량을 늘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요시다에게 "일본의 통계는 참 엉터리요. 믿을 수가 없어."이라고 힐난하자 요시다 왈,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으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거나 이렇게까지 지지는 않았겠지요."'''[* 농담이 아니고,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 제국]]은 통계고 보고고 뭐고 간에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패전은 승전이라 하질 않나, 보급받은 건 떼먹지 않나...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다면 진짜로 일본이 그만큼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통계와 보고가 제대로 들어올 정도면 최소한의 정신머리는 잡혀 있다는거니까.] *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요시다는 사망 직전까지 정치인이었고, 사람의 이목을 많이 받는 자리에 있었는데 [[치매]]가 보고된 적은 없었다, 그냥 순수하게 기억력이 별로 좋지 못했던 것(...)] 자기 측근 정치인의 이름도 잘못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쇼와 덴노]]에게 각료 명단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자기 측근이었던 오자와 사에키([[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의 이름도 틀려서 천황이 직접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시가(담배)|시가]] 애호가였다고 한다. 평상시 시가를 빼놓지 않았다.[[http://blogimg.goo.ne.jp/user_image/51/49/375d200b6f0f31fcfb989e1688601219.jpg|#]] 헨리 클레이와 코히바를 즐겨 피웠다고 한다. * 1953년 1월 미국 방문 도중 일본을 들린 [[이승만]] 대통령과 비공식 회담을 한 적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당시 요시다 시게루와 이승만 둘 다 자유당이라는 당명의 정당에 속해 있었다.] 한미일 삼자 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살았던 이승만이나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 시게루나 둘 다 [[영어]] 실력이 출중해서 통역없이 영어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배석하였던 [[김용식]] 당시 [[주일대사|주일대표부 대사]][* 훗날 [[외교부장관|외무장관]], [[통일부장관|국토통일원 장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주유엔대사]] 등을 지냈다.]는 이승만이 "Mr. 요시다. 나나 당신이나 앞으로 10년 이상 오랫동안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나 일본국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한일협정]]은 정확히 10년 뒤 1963년에 협상이 이루어져 1965년에 체결됐다. 참고로 이승만은 1965년, 요시다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둘 모두 정계에서 물러난 뒤였다. 이들 두 지도자 사이에 '[[호랑이]] 일화'라는 야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요시다 시게루가 이승만에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이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다 잡아가서 이젠 한 마리도 없다!"라고 날카롭게 응수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내용으로, 당시 이승만을 수행했던 [[백선엽]]의 증언에 따르면 요시다 시게루가 "내가 [[중국]]에 근무할 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은 "1명은 관리로 만들고 1명은 [[승려|중]]으로 만들기 위해 아들을 기본적으로 둘을 낳는데, 아들 하나가 호랑이에 물려갈 때를 대비해서 하나쯤은 예비로 낳는다." 하며 농담조로 그 말을 긍정했다고 한다. * 1954년, 서독을 방문하였을때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며 벤츠를 한대 구입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수입 규제 때문에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뒤, 10여년이 흘러[[https://www.webcg.net/articles/-/7823|1963년 벤츠를 선물받고]][* S클래스의 전신인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s-3.2|W112 300SE 롱 휠베이스 모델]]로 일본에 첫번째로 수입된 모델이었다] 매우 기뻐하며 아데나워 수상측에게 그때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며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해당 벤츠는 요시다의 또 다른 애차였던 [[롤스로이스]]와[* 영국대사 시절 구입하여 귀국할때 선편으로 들여와 계속해서 타고 다녔다. 나중에 50년대에 다시 영국으로 보내 [[오버홀]]을 받았다고 하니 차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던듯 하다.] 함께 지금도 보존된다. *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둘다 강한 반공성향에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전후 복구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각각 나치, 군부에 탄압당했으며 전후의 점령군과의 마찰이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요시다와 아데나워는 서로 친분이 있었다.[[http://www.town.oiso.kanagawa.jp/material/images/group/30/adenauer.jpg|1960년, 요시다의 사저를 방문한 아데나워]] * [[김성한(작가)|김성한]]의 희곡 대본 <오분간>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담판을 벌이는 사이 중간중간에 곁다리 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계 인물(?)들 중 하나로도 등장하는데, 하토야마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은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길]][[전무]]라고 나온다. * 애견인이었다. 많을 때는 개 10마리 이상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하며 [[가나가와현]] 오이소마치에 위치한 그의 저택 정원 한켠에는 요시다가 길렀던 개들의 무덤과 묘비들이 서있다. *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역대 전후 총리 평가 여론조사에서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그의 재임시절인 1954년 11월 21일 [[독도대첩]]이라는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우리나라의 [[독도의용수비대]]와 [[해상보안청]]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일개 장관이 저질렸다기엔 장관에 대한 문책이나 비판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 시게루의 직접 지시로 벌어진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